오늘의 런치세트
- 변승현

- 9월 2일
- 3분 분량
최종 수정일: 10월 1일
제가 횟집 아들이라 아는데, 이거 되게 싸구려라서 많이 남는대요.
아 네...
자신이 살 테니 무엇을 먹고 싶냐는 남자의 말에, 냉큼 초밥을 말했다. 밥이라도 비싼 걸 먹어야 후회가 안 남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 예상과 달리 다소 합리적인 가격의 점심특선에 심란해져 왔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남자는 모둠초밥 속 참돔... 이 아닌 중국산 점성어를 가리키며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네타가 어쩌고, 샤리가 저쩌고. 난 남자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이름도 모를 생선 초밥을 입에 집어넣었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저 소심한 얼굴에 와사비라도 한 웅큼 처먹일 것만 같았다. 질겅질겅. 식촛물에 담갔다 뺀 듯한 플라스틱이 입안을 돌아다니는 느낌이 들었다.
탈반 선언과 함께 헌포를 찾았다. 여자에게 정이 떨어진 탓이었다. 이제 그 누구에게도 깁을 주지 않을 것이며 에이블리좆밥룩만 입는 일스헤녀가 될 것이다… 그 누구도 날 말릴 수 없다… 사실 레즈들은 주기적으로 탈반 선언을 한다. 근데 그게 진짜 탈반하고 남자 만나겠다는 뜻은 아니고, 씨발 힘들어서 못 해먹겠다 정도의 뜻이다. 계속 탈반했다는 사실을 까먹어서 콜레트 보고 왔어요. 미치겠네. 오늘부터 진짜 탈반한다. 하지만 어제는 달랐다. 그 외에 어릴 땐 평생 여자만 만나겠다 싶던 레즈비언들도 삼십 대 즈음 되면 갑자기 머리 기르고 남친을 만나지 않나. 혹시 나도 이성애가 맞는 사람일 수도 있지 않나. 계속 여자만 만나니까 정신이 이상하게 변한 거다. 진짜 이 미친 클럽과 레즈 어플에서 벗어나 그냥 자만추 가능한 사회인 1로 살고 싶었다.
그래서 남자와 스무 살 때 이후로 십 년 만에 섹스를 했다. 그 사람의 취향, 습관, 말투, 약간의 병력과 섬세한 무례함들까지, 모두 품기엔 너무 지쳤다. 상대로 이성을 고른 것도 같은 이유였다. 조금은 더 무디지 않을까. 여자보다야 쉽지 않을까. 솔직히 눈앞에 남자를 고른 이유, 그냥 가장 성병 안 걸린 것처럼 생겨서였지만 어쩌면 더 간단한 이유 탓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모텔에서 뒤늦게 일어나 간신히 점심시간에 맞춰 초밥을 먹고 있다. 분명 포차 조명 밑에서 괜찮아 보였던 남자는 자연광에선 그저 그랬다. 그니까 말하자면, 손에 힘을 뺀 채 HB 연필심으로 그린 것처럼 흐릿했다. 그와의 섹스도 마찬가지였다. 착실하게 신음은 냈던 것 같은데, 뭔가 만족스럽지 않았다. 삽입이 오랜만이라 그런가. 오히려 노력하는 그의 모습이 애처로울 지경이었다. 그도 그럴 게 레즈에겐 손이 성기니까. 길다면 긴 시간 동안 그런 관계에 익숙해졌을지도 모른다. 유일하게 마음에 드는 건 그가 생각보다 굉장히 청결했다는 건데, 빽자지에 섹스를 하기 전과 후 정말 깨끗하게 씻었다. 문득 퀴어력은 때론 달란트의 영역이기에 파트너가 남자든 여자든 내 바이퀴어력을 강화하는 것밖에 안 된다던 트윗이 떠올랐다. 게이는 탈반해도 여자랑 가정 꾸리기 힘들던데 레즈들은 왜 그 모양인가?
남자가 수저를 떨어뜨리는 소리가 들렸다. 바닥에서 수저를 집더니 물티슈로 닦곤 식탁에 올려두었다. 그리곤 다시 물티슈를 꺼내 손을 닦았다. 지금 보니 남자의 주변엔 뜯긴 물티슈 껍질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되게 청결하시네요.
그 말에 남자는 머쓱해하더니, 잘도 가정사를 나불대기 시작했다.
사실 아버지가 횟집을 하셔서 냄새에 민감했거든요. 비린내라는 게 씻어도 잘 안 빠지잖아요.
문득 남자의 손이 보였다. 일 한번 안 해본 듯, 섬섬옥수같이 고운 손이었다. 나도 손톱 정리를 열심히 한 손을 바라보았다. 여자를 만나기 위해서도 없지 않지만, 사실 입시 때부터 손톱 사이에 흙이 끼는 게 싫어서 정리하다 보니 습관이 되었다. 인생은 습관. 인생은 습관. 이따금 옷차림이나 신발의 형태, 손톱의 길이까지도 살아온 방식이 그대로 드러나는 법이다. 나는 문득 남자의 옷차림을 바라보았다. 지난 밤의 여파로 조금은 구겨졌지만, 깔끔한 셔츠에 면바지 차림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클럽에 어울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회를 보면 늘 아버지 생각이 나요.
여기가 편의점 의자인지, 함뜨 후 호텔 근처 식당인지, 남자는 술 한 방울도 안 한 채 묻지도 않은 가정사를 얘기했다. 말하고 싶어 견딜 수 없다기보단, 어색함에 아무 말이나 하는 듯 보였다.
그래서 사실 저는 날생선 잘 안 먹어요. 무서워서.
오늘은 드셨잖아요.
그건 먼저 드시자고 하셔서...
싫으면 싫다고 말을 하지.
죄송해요...
아, 답답하다. 답답해서 미치겠다. 난 다시 테이블 오른쪽 양념통에 놓인 와사비를 바라봤다.
그쪽 광어랑 도미도 구분 가능해요?
어색함을 참지 못한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남자는 마치 할 일을 찾은 듯 안심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광어랑 도미는 확실히 다르죠.
어떻게요?
광어는 좀 더 통통하잖아요. 등 쪽이.
그건 넙치일걸요. 광어는 더 납작하잖아요.
아, 그렇죠. 그럼 도미가 납작한가?
아니요. 도미는 그거보다 도톰하죠.
오. 그럼 둘 다 넙적하면 그게 광도미였나요?
지금 그건 그냥 복어예요.
복어! 아 그건 독 있잖아요. 그래서 못 먹어요.
이 초밥은 드셨어요.
네?
그게 복어예요.
아 진짜요? 이게 그 맹독이란 거구나…
사실 계란말이였어요.
아…
...
...
형광색 문어는 어디서 잡는지 알아요?
요즘엔 다 색소로 잡는다더라고요.
공판장? 남자는 조용히 중얼거리더니 잠깐 시선을 떨구었다. 다시 물티슈를 한 장 더 뜯었다. 그의 손엔 이미 여덟 장쯤의 젖은 종이뭉치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할 때마다 한 장씩 물티슈가 줄었다. 한마디에 한 장. 머쓱할 때는 두 장.
원래 회 좋아하시나 봐요?
아뇨. 그냥 밥이라도 비싼 거 먹어야 후회 안 할 것 같아서.
그는 물티슈를 또 하나 뜯었다. 아홉. 나는 와사비를 젓가락으로 건드리며, 속으로 숫자를 세었다. 열. 열하나. 열둘.
저 사실 레즈예요.
아... 네?
탈반하려고 그쪽이랑 잤는데, 역시 전 여자가 좋은 것 같아요. 말초적 끌림이 없달까요?
이번엔 그가 입에 초밥을 욱여넣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난 계속 말을 이어갔다. 어차피 오늘 아니면 영영 안 만날 사람. 어디 가서 소문낸대도 내 귀까진 들리지 않을 사람. 대충 싸고 무슨 회든 상관없고, 내일이면 바뀔 그런 거. 우리에겐 딱 11,000원짜리 런치세트가 어울렸다. 맛없다 해도 어차피 저녁이 되면 뭘 먹었는지도 잊어버릴 게 분명하다. 시간은 오후 4시. 브레이크 타임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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